소나무와 동백
백영옥 소설가(조선일보 2021.12.18.)
소나무가 그려진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은 적이 있다. 카드에는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소나무가 되어다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시기에 푸른 건 소나무뿐이다. 공자도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고 노래한 성삼문은 어떤가. 선비를 상징하는 소나무처럼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다 갔다.
나무에 관한 책을 읽다가 소나무가 독야청청한 이유를 알았다. 소나무의 뿌리와 솔잎에서는 독성 물질인 갈로타닌이 분비되는데, 이 물질은 주위의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 ‘거목 밑에 잔솔(애송) 못 자란다’는 말도 이를 뜻한다. 산림욕을 할 때 듣는 ‘피톤치드’의 어원은 ‘식물’을 뜻하는 ‘phyton’과 ‘죽이다’를 뜻하는 ‘cide’의 합성어다. 이것은 나무가 다른 식물과 해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일종의 항균 작용으로 소나무가 홀로 고고한 이유도 비슷하다.
살다 보면 독야청청, 변치 않고 자신의 모습을 굳게 지켜나가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고독’과 ‘고립’을 분별해야 하듯 ‘고독’과 ‘공존’은 조화로울 때라야 가치를 발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달려갈 때는 독야청청할 수 있어야 하고, 다소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공동체에 도움이 될 때는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침엽수인 소나무는 홀로 고고하게 아름답고, 활엽수인 참나무 잎은 흩어져 땅의 비옥한 거름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이 숲은 이미 자연의 지혜를 터득해 ‘더불어’ 살아온 셈이다.
지금 남쪽에는 동백이 한창이다. 이전에는 꼿꼿이 목을 든 채 통째로 떨어지는 저 꽃이 무섭기도 했지만 이젠 ‘기개’와 ‘성품’이 느껴져 소중해진다. 소나무를 닮은 꽃을 꼽으라면 이젠 동백을 꼽고 싶다. 훌쩍 피었다가 시들지 않은 채 제 목을 쳐내며 떨어지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독야청청 아니면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