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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된 서울역그릴 폐업

이은우 논설위원(동아일보 2021-12-02)

 

한국의 첫 경양식당인 서울역 그릴이 지난달 30일 문을 닫았다. 개점한 지 96, 한국인에게 돈가스 맛을 처음 알린 곳이 100년을 목전에 두고 폐업했다. 작가 이상이 커피를 마셨고, 그의 소설 날개에 등장한 식당이다. 6·25전쟁과 외환위기도 이겨냈지만 코로나19를 피해 가지 못했다. 마지막 영업일에는 머리가 희끗한 고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는 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릴은 1925년 르네상스 양식의 옛 서울역(당시 경성역) 2층에 문을 열었다. 식당 별실에는 상평통보를 형상화한 원탁과 은제 식기를 갖췄다. 호화식당답게 정찬 값은 당시 설렁탕 가격의 21배였다. 신역사로 옮기고 대중식당으로 변신했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 의자와 타일, 샹들리에는 중년의 웨이터와 잘 어울렸다. 양식에 깍두기와 납작한 접시 밥이 나오고, 후추를 뿌려야만 할 것 같은 크림수프는 추억의 맛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단골 발길마저 끊어졌다.

 

마지막 영업 날, 그릴은 오랜만에 만석이었다. 폐업 소식을 듣고 찾은 고객들은 식당 내부와 음식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부모님의 맞선 장소, 할아버지와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릴의 부활을 기대했다. 서울역사를 운영하는 한화역사는 그릴을 포함해 문을 닫은 식당가를 리모델링한다고 밝혔다. 그릴 자리에 스테이크집이 들어올 것이란 소문도 있는데 그릴 상호를 다시 사용할지는 불투명하다.

 

코로나로 노포(老鋪)들이 사라지는 건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과 유럽에선 수백 년 된 식당이 줄줄이 폐업하고 있다. 일본 도쿄에선 231년 된 민물고깃집 가와진이 문을 닫았고, 복어 등불 간판으로 유명한 오사카 맛집 즈보라야100년 만에 폐업했다. 독일에선 식당과 술집들이 문을 닫으면서 400년 전통의 베르네크 양조장이 덩달아 폐업했다. 가와진 직원들은 폐점식날 눈물을 쏟았고, 베르네크 양조장 매니저는 이곳이 너무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한국 음식점 10곳 중 4곳은 개업 후 1년 내 문을 닫는다. 5년 뒤까지 살아남는 식당은 20%에 불과하다. 유럽에는 수백 년 된 식당이 곳곳에 있지만, 한국에는 100년을 넘긴 곳도 손에 꼽는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식당 절반이 폐업 위기에 몰렸다. 많은 업주들이 100년 노포를 꿈꾸며 창업했을 것이다. 이런 도전이 코로나에 꺾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를 이어 맛과 정취를 지켜가는 식당이 많아질수록 고객의 추억도 쌓인다. 오는 주말엔 가족과 함께 오랜 단골집을 찾아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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