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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10:54

무통 사회 - 양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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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통 사회

 

양창모ㅣ강원도의 왕진의사 (한겨레 2020-12-10)

 

  시골에 왕진을 가보면 무릎 관절염을 호소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치료가 어렵지만 특효약이 없는 건 아니다. 소위 뼈주사라고 하는 관절강 내 스테로이드 주사가 있다. 이 주사를 맞은 분들은 단 며칠 만에 통증이 없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관절염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약 자체가 관절에 미치는 작용 때문이기도 하고 통증이 없어진 게 원인이 되기도 한다. 통증 때문에 안 썼던 무릎을 통증이 없어지면서 더 많이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근골격계 통증은 기존의 생활습관을 바꾸라는 몸의 신호인 경우가 많다. 무릎 관절염에 대한 뼈주사의 악영향은 통증이 사라지거나 무시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미국 대선의 대혼란 이후 미국 내에서는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탄식이 계속된다고 한다. 뉴욕의 기자들에게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지금왔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외부자들이 보기에 그들의 위기는 이미 왔었다.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늘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새롭게 할 힘을 잃었다. 체제를 새롭게 할 힘은 사회적 고통에서 나온다. 미국 사회는 고통은 만연하나 그 고통의 언어를 정치의 언어로 바꾸어 체제를 재구성할 새로운 정치가 없다. 흑인들이 길거리에서 경찰 폭력에 의해 쓰러져도, 전세계 코로나 확진자 5명 중 1명이 미국에서 발생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뜨거운 물에 손이 닿았을 때 통증은 곧바로 대뇌로 전달되어 내 손을 보호하는 동작을 취하게 된다. 통증은 있지만 대뇌가 아무것도 느끼질 못해 아무런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그건 아픈 사람이다. 민주주의란 바로 그 신경회로와 같다. 미국은 그 신경 통로가 끊어진 아픈 사회다. 고통이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유령처럼 배회할 때 무기력은 안개처럼 한 사회를 뒤덮는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각자도생의 깨달음을 준다. 17살 고등학생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총으로 무차별 살해해도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총기 소유가 유지되는 미국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무기력한 사회다.

 

  무통 주사라는 게 있다. 주로 외과 영역에서 사용되는 이 주사는 통증을 없애는 주사가 아니다. 그 통증이 대뇌에 전달되는 경로를 차단하는 주사다. 마찬가지로 무통 사회는 통증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그런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회적 통증들이 한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이끄는 길이 차단된 사회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의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지표다. 아픈 사람은 아픈 곳을 가장 먼저 신경 쓴다. 허리 통증이 있는 사람은 움직일 때 허리에 온 신경이 가 있다. 사회도 동일하다. 사회가 움직이며 변화의 방향을 정할 때 그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한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길을 잃은 사회에서는 희망도 길을 잃는다. 그 증거를 지난 한달간 봐왔다. 바로 미국이라는 무통 사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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