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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는 아이에게 무엇을 남길까

 

선우현정 임상심리전문가·정신건강임상심리사(경향신문, 2020.6.13.)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씩씩거리는 가쁜 숨, 뻣뻣하게 굳어 있는 어깨를 보고 나는 책상 밑으로 아이의 꽉 쥔 주먹이 보이는 듯했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아이의 분해하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아이는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던 20대 후반에 만났다.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아이. 당시 내가 일하고 있던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아동학대로 신고 접수된 아이였다. “안녕!” 내 인사에 아이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고, 내 주변을 맴돌다가 눈이 마주치면 꺄르르 웃으며 파티션 뒤로 숨었다. 그렇게 밝고 협조적이었던 아이는 심리검사 중에 왜 분노하게 되었을까. “네 가족들이 다 함께, 무언가 하고 있는 장면을 그려 볼래?”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의 표정은 순간 차갑게 굳어 버렸다

 

    부모의 학대는 아이에게 무엇을 남길까. 친모를 피해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왔던 9살 여자아이의 멍든 눈, 찢어진 머리, 손가락의 화상. 학대는 아이에게 끔찍한 상처로 남아있었다. 계모에 의해 여행가방에 갇혀 의식을 잃어가던 9살의 남자아이는 병원으로 옮긴 지 사흘 만에 숨지고 말았다. 학대는 아이에게 죽음까지 남겼다.

 

    죽음이 비켜가고, 상처들이 회복된 뒤에도 학대는 여전히 남아있다.

    심리적 외상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아물거나 고통이 가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심리적 외상의 징후로 대표적인 것은 정서 반응이다. 불안, 우울, 그리고 분노와 공격성. 모델로 삼을 만한 건강한 대상이 없는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보인다. 내가 만났던 아이도 가족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감정이 아주 빠르게 분노로 바뀌어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위압적인 성인의 폭력은 아이의 통제 밖의 것이다. 이를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거나 일일이 강렬한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은 소모적이므로 아이는 무감각해지는 것을 택하게 된다. 행동주의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한다.

 

     자아상 또한 문제가 된다. 많은 경우 아이는 자신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매력 있는지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파괴적인 상황이 반복될 경우 아이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건강하게 통합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분절된 감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omplex PTSD)’라고 한다.

 

     대인관계도 영향을 받는다. 타인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지 못하여 주변을 경계하고 의심하며, 때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니면 가깝지 않은 사이에도 지나치게 친밀하게 굴거나, 청소년이 되어서는 무분별한 성관계를 갖는 등 애정에 대한 갈구로 적절한 경계를 설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의 학대는 자연재해에 의한 정신적 충격보다 더 극심한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끔찍한 문제는 왜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는 걸까. 어린아이들과 상담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꾸준히 하기.’ 개인적으로 매우 정직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아동학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 왔는가. 거시적인 측면에서 일시적인 관심을 갖는 것 외에 말이다. 더 이상 이 문제가 피해 아동과 학대 행위자, 그리고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만 종속되는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학대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학대가 발견된 후 아이에게 어떤 절차가 기다리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꾸준히 변화해 나갈 수 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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