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일 관계의 세가지 이야기
회원 차 웅 렬
한가람 서지학회장
첫째, 오늘날 한,일 관계에 있어 양국이 깊은 관심을 갖고 대결하고 있는 독도(한국), 다케시마(일본) 문제가 끊이지 않고 들끓고 있다.
한 일 양측에서 말하는 독도 (다케시마) 밀약은 1960년대의 한,일 권력을 쥔 상층부 사이에서 의논 끝에 이 후 약 30년간 지켜왔다. 독도 문제는 양국이 상호 논쟁을 안 하기로 한 협정이었으며 한,일 정상화를 위해 한,일 기본조약(1965)을 체결하는데 있어 최대 관심거리인 독도문제를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외교의 뒷면에서 비밀리에 체결되었다.
서명을 한 것은 일본 측 전권 “가노와 이지로” 국무대신, 한국 측은 “정일권” 국무총리이며 최고자리의 일본의 “사도 메이사구” 총리대신과 한국 “박정희”대통령의 양해를 얻었다.
그러나 밀약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한 일 간에 극히 소수에 이른다. (한국인 4명, 일본인 7명) 밀약의 존재가 공표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는 사람은 적다. 공식적으로는 양국 정부 간의 밀약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밀약내용은 “독도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하고 한,일 기본조약에서는 손대지 않는 다.” 여기에 네 가지 항목의 합의 사항은 부록으로 남겼다.
1) 양국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반론하는 것에는 이론이 없다.
2) 그러나 장래에 어업구역을 상정 할 때에는 쌍방이 자국 령으로 하여 선을 긋고 같이 선이 그어진 부분을 공동구역으로 한다.
3) 한국은 현장을 유지하고 경비원의 증감과 시설의 신설 증설을 안 한다.
4) 이 합의는 이 후에도 계속되어 나간다.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양국 모두 독도는 자기나라 섬이라고 주장하여도 좋도록 되어있다. 독자의 주장을 영원히 끌고 갈 수 있도록 상호 인정한 것이다.
둘째, 일본인들의 신앙인 신사는 고대 한국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으며 일부 신사는 한국의 조상신을 모시고 있다.
동경에서 그리 멀지않은 “사이다마, 가나가와현”등 관동지방과 “오오사카”, “교토“등 여러 신사들은 한국 신을 모시고 있다. (약 50개) 일본에 건너간 고대 한반도 도래인들은 고향에서의 관습대로 제단을 세워 조상신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에 따라 한반도 계통의 신사가 일본에 생겨났다.
필자가 서울 화계초등학교 재직 시에 ”사마이다현의 우라와“시의 ”누마가게 소학교“와 축구를 통한 친목교환 경기로 매년 여름 방학에 일본 축구선수들과 상호교환경기를 성대히 베풀었다. 바로 그 곳에 있는 고마 신사는 한반도 계통의 신사이며 이 신사가 자리한 히다가시는 서기 716년 고구려계 도래인들이 세운 고마군이 설치 됐던 곳이다.
오사카부의 ”아스가베신사“는 백제 계 ”아스가베노 미야코“의 일족의 조상신인 ”아스카오가미“를 제사 지내고 있다. 바로 이 “아스카오가미”는 백제의 “곤지왕”이다. 시고구 지역 도구시마현에는 신라 신사가 있다. 특히 이 신사는 대표적 신라 신사이자 우두천황(牛頭天皇)으로 알려진 “스사노오노미코도”라는 신을 모신다. 일본에 흩어져있는 다수의 신사가 고대 한반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1992년 해마다 열리는 일본 황거(皇居)에서 열린 봄의 원유회에서 현 일본의 천황인 “아끼히도”가 일본의 “간무천황”을 낳은 모친이 백제의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일본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쓰여져 있으며 오경(五經)박사가 대대로 초청됐으며 일본의 여러 왕자가 백제로 유학을 갔으며 성명왕(聖明王)은 일본에 교육을 전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해지니 일본 최고의 신문인 “요미우리”신문은 침묵했고, “아사히”신문은 크게 보도했다. 일본 보수진영에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한국에서도 크게 보도되어 큰 감동을 자아냈다.
근자에 국력이 시들어 가고 있는 일본은 극우 세력들이 신 일본을 창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속에 우리도 국력을 더욱 키워 나가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