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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으니 봄도 머지않으리! 들에, 마을에

 

고두현 논설위원(한국경제 21.01.29)

 

겨울 막바지, 동장군의 칼바람이 매섭다. 폭설까지 겹쳤다. 가난한 이들의 쪽방에는 바늘구멍만 한 문틈으로도 황소바람이 파고든다. 온 들판과 마을, 골목과 광장이 을씨년스럽다. 사람들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혹한에 갇힌 한 친구가 모바일 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시인과 걸인에 관한 옛 일화였다.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 어느 날 모스크바 광장을 지나다가 시각장애 거지를 발견했다.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는 거지는 얼어 죽게 생겼습니다. 한푼 줍쇼하며 애걸했다. 행인들은 종종걸음만 쳤다. 한참 지켜보던 푸시킨이 다가가 말했다. “나도 가난해서 돈이 없소만, 글씨 몇 자를 써서 주겠소.”

 

며칠 후 친구와 함께 그 자리를 지나는 푸시킨에게 거지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며칠 전 그분이군요. 그날부터 깡통에 돈이 수북해졌습니다. 대체 뭐라고 써주신 건지요?” 푸시킨은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닙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머지않으리라고 썼습니다.”

 

별거 아닌그 문구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1792~1822)서풍에 부치는 노래마지막 구절이었다. ‘예언의 나팔을 불어라! 오오, 바람이여,/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오면왔으니라고 푸시킨이 바꾼 것이다.

 

푸시킨은 자유로운 정신과 강골 기질로 러시아 황제의 미움을 사 유배와 검열에 시달렸다. 그만큼 겨울과 봄, 고난과 희망의 은유적인 표현에 민감했다. 지금 힘들더라도 슬픔을 이겨내면 반드시 기쁨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의 시를 세계인이 애송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현재는 늘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그는 온갖 부조리의 화살에 맞서 희망의 갑옷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나의 기도라는 시에서는 마음을 죽이는 나태독을 품은 눈을 가진 시기속에서 내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차기를소망하기도 했다.

 

시인과 걸인, 겨울과 봄에 얽힌 얘기 중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일화도 있다. 1920년대 뉴욕의 한 시각장애인이 저는 앞을 못 봅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앉아 있었다. 행인들은 무심코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팻말의 글귀를 바꿔놓고 사라졌다. ‘봄이 오고 있지만 저는 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투어 적선했다.

 

팻말의 문구를 바꿔 준 사람은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라고 한다. 그는 평소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상상력의 힘이 우위에 있다현실과 상상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서도 걸인의 보이지 않는 눈과 행인들의 보이는 봄을 상상과 은유의 다리로 절묘하게 연결했다.

 

또 하나, 러시아 시인·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산문시 거지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겨울날 길에서 늙은 거지를 만난 그는 무언가를 주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빈손으로 거지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거지는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적선을 받았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혹한과 감염병으로 모두가 힘든 시절이다. 몸으로 겪는 칼바람과 폭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음의 추위와 가난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지만, 따뜻한 손길로 희망의 등불을 건네는 이웃들이 있는 한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 만하다. 어디선가 눈 속에서 싹을 준비하는 얼음새꽃의 잔뿌리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봄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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