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폭행·성적확대범·청부할인… 범죄용어 활용한 도넘는 신조어
조유미 기자(조선일보 2021.06.21)
- 관심 끌려고 만든 자극적인 말… 유튜브·기업광고까지 마구 등장
- 전문가 “폭력 희화화한 표현, 사람들 인식·행동에 나쁜 영향”
“오늘 엄마, 할머니하고 동네 잔칫집 갔다가 정신없이 ‘식폭행’ 당했다.”
직장인 황은아(28)씨는 최근 온라인의 한 여성 전용 카페에서 이런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식(食)폭행’은 특정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과식을 하게 됐다는 뜻의 신조어다. ‘당했다’는 표현과 함께 쓰이다 보니 ‘성폭행’이 연상된 것이다. 심지어 해당 글에는 “또 당하면 좋겠다”란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황씨는 “아무리 신조어라지만 도를 넘은 것 같다”고 했다.
유통 업계에선 최근 ‘연쇄할인마’ ‘청부할인’과 같은 표현도 심심치않게 쓰이고 있다. 모두 ‘연쇄살인마’ ‘청부살인’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실제로 전자상거래 업체인 위메프는 지난해 할인 제품을 홍보하는 영상을 만들면서 ‘청부할인’이란 이름을 붙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유튜브, 소셜미디어 등을 중심으로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로 ‘성폭력’ ‘범죄’ 등을 활용한 신조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누군가 처음 만들어서 쓰면, 이를 캡처한 화면이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곧 기업 광고, 유튜브 콘텐츠, 온라인 매체 등을 통해 본격 확산한다. 의미를 재미있고 간결하게 전달한다는 특징이 있지만, 폭력 행위를 희화화한다는 우려도 있다.
이런 조어는 범죄 용어 일부를 살짝 바꿔 긍정의 뜻으로 만든다. 최근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확대범’ 표현이 대표적이다. 학대 범죄를 저지른 ‘학대범’을 바꾼 표현으로, ‘고양이 확대범’(고양이를 잘 보살펴 살을 찌움), ‘아동 확대범’(아동을 잘 보살펴 성장하게 함) 등으로 쓰인다. 최근 일부 온라인 매체에까지 쓰인 ‘성적(成績) 확대범’(성적이 오르도록 함)이란 말은 ‘성적(性的) 학대’와 음도 유사하다.
무언가 ‘뛰어나다’는 뜻을 ‘폭력배’와 ‘깡패’에 빗대서 표현하는 문화도 생겼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은 ‘맛깡패’,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은 ‘얼굴깡패’, 분위기 좋은 곳은 ‘분위기깡패’라 부르는 식이다. ‘팩력배(팩트+폭력배)’는 사실에 기반한 주장으로 상대방 논리를 무력화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전문가들은 이런 표현이 온라인에서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단어를 고르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튜브, 온라인 매체 등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귀에 쏙 들어오는 표현을 무분별하게 선택하다 보니 범죄와 관련된 표현도 거리낌없이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조회 수가 곧 수입으로 이어지는 유튜브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20일 유튜브에 식폭행을 검색하자 ‘오늘 식폭행했다’ ‘할머니에게 식폭행당한 썰’과 같은 게시물 수백 건이 쏟아졌다. 한 프랜차이즈 업체의 협찬을 받아 제작됐다는 ‘천상계 몸매와 식폭행하면 생기는 일’이라는 영상은 총 59만여 회나 조회됐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식폭행, 그만 먹게 해주세요’ ‘살려주세요’란 문구를 적어 넣은 영상도 있었다. 모두 청소년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영상들이다.
이런 표현이 일상화하면 사람들의 폭력 감수성이 둔화된다는 지적도 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상화된 언어 표현은 사람들의 인식과 판단,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며 “‘식폭행당했다'는 표현이 점차 확산하면 이런 일탈을 사람들이 점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