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만에 깨어난 最古 한글 금속활자
인사동 땅속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 발견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2021.06.30)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를 포함, 15~16세기에 만든 활자들이다. 이 중에는 현존 최고(最古)의 조선 금속활자인 을해자(세조 1455년)보다 21년 앞선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도 다량 포함됐다. 향후 연구를 거쳐 ‘갑인자’로 공인될 경우, 조선 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이른 실물 자료일 뿐 아니라 1450년대 찍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최소 16년 앞선 금속활자가 처음 출토된 것이라 세계 인쇄사를 바꿀 발견으로 주목된다.
발견 장소는 서울 종로 피맛골 뒤편 인사동 79번지. 공평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을 위해 발굴 조사 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이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지난해 3월부터 정밀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인 곳이다. 문화재청과 수도문물연구원은 이곳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을 비롯, 물시계 부속 장치인 주전(籌箭), 세종 때 만든 천문 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중종~선조 때 만든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 금속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다며 2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물을 공개했다.
가장 눈길 끄는 건 항아리에 담긴 채 발견된 금속활자 1600여점. 모두 15~16세기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한글과 한자, 서체, 크기, 형태 등 최소 5종류 이상의 활자가 섞여 있다. 한글 활자 약 600점, 한자 활자 1000여점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서지학 전문가들은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실물로 출토된 것 자체가 처음”이라고 했다.
특히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활자와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활자가 주목된다. 그간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 30여점과 같은 시기로 추정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동국정운식 표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의미가 크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백두현 경북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동국정운이란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 한자음을 바로잡고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운서(韻書)로, 중국의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 ㅭ, ㆆ, ㅸ 등이 기록됐는데 이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했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는 조선 왕실에서 쓰이다가 일제강점기 이왕직을 거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된 것들이지만, 이번 활자들은 동반 유물과 함께 ‘출토’된 최초의 활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이날 연구자들은 갑인자 추정 활자들에 대해서 “공인되면 세계 인쇄사를 바꿀 유례없는 성과”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신중한 연구를 거쳐야 한다”고 전제했다. 활자의 특성상 육안만으로 판단이 어렵고, 향후 활자를 찍어서 인쇄본과 대조하는 등 후속 연구가 면밀히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조선 전기 과학 유물이 함께 출토된 것도 이례적이다. 물시계의 장치인 ‘주전’은 시간을 알리는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으로 실물이 출토된 건 처음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세종 때 과학 유산은 이야기만 전할 뿐 유물이 거의 없었다”며 “세종 시대 과학기술을 복원할 실마리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했다.
■ 종로는 ‘조선의 폼페이’… 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나
最古 한글 금속활자 출토된 종로, 경주·부여 못지않은 문화재 寶庫
허윤희 기자(주말조선 2021.07.03)
“대단한 발견입니다! 서울 종로 땅은 파면 반드시 유물이 나온다는 걸 제대로 보여줬네요.”
“역시 종로는 ‘조선의 폼페이’라니까요.”
서울 인사동 땅속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을 비롯해 물시계 장치, 천문 시계, 총통(銃筒), 동종 등 금속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29일, 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고고학자들은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나온 건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라면서도 “역시 종로는 종로”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박준범 서울문화유산연구원 부원장은 “사람들은 흔히 경주나 공주, 부여 같은 역사 도시만 발굴하면 뭐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서울 한양도성 내부엔 조선 시대 수많은 유물과 골목, 도로가 폼페이처럼 고스란히 묻혀 있다”고 했다. 왜 종로 일대가 노다지 땅이 된 걸까.
◇종로는 조선의 폼페이
지난 2009년 6월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말간 조선 백자(白磁) 3점이 출토됐다. 조선 시대 ‘피맛골’로 불린 청진동 235번지 재개발 공사 현장에서 발굴단원들이 19세기 건물 터를 파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여기 도자기가 묻혀 있다!” 건물 기단에서 2m쯤 내려갔을 때 구덩이 속에서 백자 항아리 3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15~16세기 최상급 백자라고 평가했고, 석 점 모두 2016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됐다. 당시 조사단은 “백자 항아리가 나온 자리에는 남향의 ‘ㄷ’자형 한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집주인이 항아리 3점을 300년 이상 가보(家寶)로 간직해오다 어떤 급박한 사건을 만나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묻은 것”으로 추정했다.
서울시 새 청사 건립을 위한 발굴 과정에서 승자총통(勝字銃筒)·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가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역시 2009년 일이다. 학계는 특히 서양식 신식 무기인 불랑기자포의 발견을 두고 “조선 시대 무기사(史)를 새로 써야 할 정도”라며 “거듭되는 외침을 막기 위한 조선 시대 사람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2009년에는 또 광화문광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조선 시대 주작대로였던 육조거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시대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던 이 길은 좌우 폭이 45~55m에 이르는 대로이자 광장이었다.
◇”서울 600년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수많은 서울시민이 매일 오가는 종로에는 조선 시대에 중앙 관청 관리들이나 시전(市廛) 행랑의 상인 등 중인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당시 시전은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품을 사고파는 상설 시장. 최종규 한울문화재연구원 원장은 “지금은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뤄지면 흙을 다 들어내는 공법을 쓰지만, 조선 시대에는 집이 허물어지면 그대로 묻고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계속 퇴적된 것”이라며 “조선 시대 상업의 중심지인 종로는 서울 600년의 모습이 지하 4~6m 깊이에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채 보존돼 있다”고 했다.
2015년엔 서울 공평동 도시환경 정비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됐다. 학계에선 “조선 전기부터 중·후기, 구한말, 현재까지의 도시 역사가 켜켜이 보존된 ‘시간 박물관’이 통째로 나온 것”이라며 “사대문 안에 남은 조선 시대 도시 유적인 만큼 전면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특히 거대한 대청마루가 있는 독특한 구조의 ㅁ자, ㄴ자형 건물터는 육의전 등이 있던 종로 옛 상가와 연관된 시설로, 조선 후기 도시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서울시는 “도시 유적과 기억을 그대로 보존하겠다”며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 1층 전체를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만들었다. 연면적 3817㎡의 서울 최대 규모 유적 전시관이다. 전시관 바닥은 투명한 유리로 깔아 발 아래로 16~17세기 건물 터와 골목길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에 금속활자가 쏟아져 나온 인사동 79번지는 이 공평유적전시관 건물 맞은편에 있다. 공평동 유적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상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한다. 견평방은 조선 최고의 번화가이자 시전의 중심지였고, 주요 관청이 들어선 육조 거리와 마주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민가의 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뜻밖의 금속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건 미스터리”라며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밝혀질 내용들이 기대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