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락의 창

조회 수 3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대면 시대 키오스크라는 괴물

 

 하윤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문화일보, 2020.11.6.)

 

어떻게 돌리는지 몰라서. 미안한데 좀 해 주실라우?”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대부분을 혼자 서울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드물지만 빨래방을 가곤 한다. 그때 구부러진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이 이불 빨랫감이 든 봉투를 내밀며 건네 온 말씀이다. “아이고, 혼자 오셨어요, 이리 주세요.” 받은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표준세탁을 누른다. 동전교환기에서 바꾼 500원짜리 동전 11개를 넣으니 작동하기 시작한다. 근심이 가득하던 어르신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띠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몇 번을 되새기신다.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을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대도시로 유학 가는 아들을 위해 고구마·호박 같은 손수 지은 농작물을 바리바리 담은 보따리를 들고 버스터미널까지 배웅 나오신 어머니 모습이.

 

KTX와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다중시설에서 진땀 흘리며 키오스크(kiosk·무인단말기) 앞에 서 계신 어르신들. 이를 보며 등 뒤로 따가운 눈총을 주는 청·장년들. 보다 못해 가끔은 직접 나서기도 하지만 늘 행동으로 옮겨지는 건 아니다. ○○컬리, 배송, QR코드, 고속도로 휴게소의 커피점, 심지어 어르신들이 즐겨 드시는 동네 국숫집까지 스크린 화면을 터치해야 주문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는 점원이 주문도 받았지만 이젠 아예 직접 화면과 소통해야 한다.

 

누군가에겐 쉽고 빠르게, 원하는 것을 손가락 하나로 할 수 있는 디지털 이기(利器)이자 축복이다.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삶의 높은 장벽인 디지털 괴물이 되고 있다. 자식을 위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나라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린 어르신, 가뜩이나 사람 사는 온정이 그리운 이에게 언택트 시대의 키오스크가 삶의 소외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국가와 지자체가 노인교육·평생교육을 통해 따뜻한 체온이 도는 친근한 디지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무얼 해 왔던가. 날로 디지털화·고도화돼 가는 키오스크 시대, 이들 디지털 소외 계층에 대한 교육과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그런데도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평생교육은 채 1%도 안 된다고 한다. 한국소비자원의 조사에서는, 키오스크에 대해 어르신들은 복잡한 단계로 인한 주문 실패에 대한 심적 부담감을 상당히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서울시는 어르신 등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키오스크 체험존’ 46곳을 만든다고 한다. 만시지탄이나, 하루빨리 정부와 지자체가 부모·어르신을 위한 종합적 디지털 키오스크 평생교육 방안을 내놔야 한다. 급변하는 디지털 문명을 일상의 괴물이 되도록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생애·평생교육 차원에서 학교 교육 못지않은 일관되고 장기적인 교육계획이어야 한다. 그래야 장차 우리도 예견하지 못한 또 다른 문명이 나에게 괴물로 둔갑하지 않게 된다. 고도화된 디지털 키오스크라는 괴물을 하루빨리 편리한 도구로 바꾸려는 정부의 대책을 다시금 채근해 본다. 한편으론, 나를 포함한 더 젊은 세대들이 키오스크에 익숙하지 못한 어르신을 기꺼이 이해하고, 솔선해 도와드리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날 결국, 모자라는 돈을 더 보태 이불 건조를 해드리면서 1시간을 더 어르신과 함께했다. 그 옛날 어릴 적에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어머니 옆에서 물장난하던 내 모습을 회상하면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7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최재천 작은의자 2021.02.01 26
46 현재가 과거를 심판하면 미래를 잃는다-김태훈 작은의자 2021.01.24 25
45 분열·증오 4년 막 내리고... '미국 치유' 바이든 시대 열린다 작은의자 2021.01.19 25
44 한국에서 ‘동네북’이 된 유교 문화 작은의자 2021.01.12 24
43 포스트코로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작은의자 2021.01.05 27
42 교육자는 거울 비춰주는 사람 - 김대진 작은의자 2020.12.12 24
» 비대면 시대 ‘키오스크’라는 괴물-하윤수 작은의자 2020.11.24 34
40 "차라리 안락사 시켜달라", 65세되면 절규하는 중증 장애노인 작은의자 2020.11.05 23
39 코로나 시대, 재조명받는 이건희의 경영 메시지 작은의자 2020.10.28 26
38 20년 후엔 셋 중 한명이 65세 이상 작은의자 2020.10.16 26
37 유언공증 성황-“내 재산 첫사랑에게” “한달 두번 찾아오라” 작은의자 2020.10.09 29
36 자식이 주는 명절 용돈에 대한 생각 서울교육삼락회 2020.09.27 32
35 비교와 공정에 대하여 작은의자 2020.09.12 24
34 광복절 아침 작은의자 2020.08.15 24
33 고령층 3명중 2명, 73세까지는 일을 해야 서울교육삼락회 2020.07.29 30
32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별세 작은의자 2020.07.13 35
31 전 세계 단3점...900년만에 돌아온 '고려 꽃무늬 나전합' file 작은의자 2020.07.03 37
30 6.25전쟁 70주년 기념식 - 북, 종전에 담대히 나서달라 file 작은의자 2020.06.25 33
29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작은의자 2020.06.25 35
28 뉴 노멀, 재택근무의 장점과 단점 file 작은의자 2020.06.06 25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