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별세]
코로나 시대, 재조명받는 이건희의 경영 메시지
위기경영으로 IMF 극복… 나라 전체 무역흑자 넘는 145억달러 흑자 달성
석남준 기자(조선일보, 2020.10.27)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고 하니까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6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며 이같이 질책했다. 삼성은 1994년 국내 최초로 경상이익 1조원을 돌파했고, 1995년에는 3조5400억원으로 늘었다. 이 회장은 이런 호황기에 사장들에게 위기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건희 경영’의 핵심 키워드로 혁신⋅속도⋅인재 등이 꼽힌다. 하지만 ‘위기’를 대표적인 키워드로 꼽는 재계·학계 인사가 적지 않다. 이 회장이 경영의 고비마다 최고의 카드로 위기를 뽑아 기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이건희의 위기 경영이 전대미문의 위기로 꼽히는 코로나 사태에 우리 기업들에 던지는 시사점이 크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금의 글로벌 삼성을 있게 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꼽히는 1993년 신경영 선언도 출발은 위기 경영이었다. 이 회장은 경영진이 생산량 증가에 만족하자, “우리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 위기를 진정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을 오래 보좌했던 한 경영자는 “(이 회장은) 위기감을 가진 조직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는 위기 신봉자 같았다”고 했다.
이 회장이 일찌감치 위기를 절감토록 하면서 삼성은 IMF 외환 위기에 앞선 1996년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유망 사업에 경영력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재구축했다”며 “경영 전(全) 분야에 걸쳐 원가와 경비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삼성은 어떤 국내 기업보다 외환 위기를 잘 극복했다. 삼성은 2002년 무역수지 흑자 145억달러를 달성해, 당시 한국 전체 무역 흑자(108억달러)를 넘어서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이 회장은 쓰러지기 전까지 위기 경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회장은 급성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기 7개월 전인 2013년 10월 열린 신경영 20주년 만찬회에서 “자만하지 말고 위기 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이 회장은 우리 기업인들에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DNA와 함께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DNA도 심어줬다”며 “코로나 위기 속에서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금 그의 위기 경영을 돌아다녀보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