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서 살아남기
김경란 웨이브 콘텐츠기획부장
(조선일보 2021.11.25.)
평소 정리를 즐긴다. 지인 연락처, 자주 찾는 사이트, 마음에 드는 기사, 가고 싶은 맛집, 보고 싶은 영화 등을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다. 저장한 것이 많아지면 찾기가 어려워 목록을 나눠 다시 분류하고, 불필요한 것은 삭제한다. 업무용 자료들도 조직, 주제, 기간별로 카테고리를 세분화해 정리한다. 디지털 공간을 정리하는 것이다.
과거 라디오로 음악과 사연을 듣던 시절에는 자주 듣던 채널의 ‘주파수’를 저장했다. 하지만 라디오 전용 앱이 대중화하면서 93.1MHz, 104.5MHz 같은 주파수를 외우거나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TV 대신 OTT(동영상 서비스)로 방송이나 영화를 보는 경우라면 7, 19, 24번 같은 채널 번호도 알 필요가 없다. 미리 ‘좋아요’한 채널을 이용하거나 보고싶은 타이틀을 검색해 시청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1~2분짜리 클립(Clip)이나 1인 크리에이터 영상을 즐겨 시청하는 10대라면 유튜브에서 영화를 리뷰하거나 음악, 요리, 스포츠, 예술 등 관심 분야의 인기 유튜버 채널을 구독하고, 최신 콘텐츠를 소비하니 채널명도 기억할 이유가 없다.
‘디지털 정리’는 시대 흐름에 맞춰 즐겨찾기, 구독, 찜, 담기 등 다양한 형태로 변하고 있다. 라디오 주파수나 TV 채널 번호를 저장하는 대신 인기 앱을 설치하고,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결혼 작사 이혼 작곡’, 티빙에서만 볼 수 있는 ‘술꾼 도시 여자들’, 웨이브에서만 볼 수 있는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등 이제는 플랫폼별로 어떤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지를 검색해 보고, 별도 구독을 신청한다.
미디어 발전은 리모컨으로 볼 만한 채널을 찾던 때보다 이용자들에게 한층 더 적극성을 요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조금 재미없다 싶으면 새로운 서비스에 즐겨 찾는 앱 자리를 내주고 미사용 앱으로 정리되기 십상이다. 과거 ‘드르륵’ 채널 돌아가는 소리처럼 말이다. 이용자들에게 정리당하지 않으려 지금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콘텐츠를 업데이트 중이다.